여말 충신 이오
선생의 호(號)는 모은(茅隱)이고 본관(本貫)은 재령(載寧)이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뛰어난 기개(氣槪)가 있어서 세속에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일찍이 포은 정 몽주(圃隱 鄭夢周), 목은 이색(牧隱 李穡) 두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면서 의리의 학문에 독실하여 당시의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
공양왕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니 포은(圃隱)선생께서 벼슬하기를 권고했으나 시기가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사양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여러 현인(賢人)들과 함게 송도교외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망복수의(罔僕守義)의 결의를 표명하고는 남쪽으로 내려와서 함안의 모곡에 복지(卜地)를 정하여 은거(隱居)하였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고려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복거지의 주위에 담을 쌓아 이 담밖은 신왕조(新王朝) 조선(朝鮮)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유민 즉 고려동(高麗洞)임을 명시하였다.
후에 3대(三代) 태종(太宗)이 여러번 출사(出仕)할 것을 바랬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너 또한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유민(遺民)이니 어찌 신왕조(新王朝)에 벼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라도 절대 신왕조(新王朝)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 말고 또 나의 신주(神主)도 이곳 고려동(高麗洞) 담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사후(死後) 묘비(墓碑)에는 글 한자 없는 백비(白碑)를 세웠다.
1796년(정조20)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운구서원(雲衢書院)에 홍재(洪載), 조열(趙恱)과 함께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