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국충절의 용장 박진영 (1569~1641)
국난을 당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 충절을 다한 인물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역사상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창의하여 국난을 이겨낸 인물들을 몇몇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애를 돌아보면 누구하나 자신을 몰각하고 강개한 기개로서 일어서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초야에 있는 사람으로서 구국의 길을 택했던 경우를 볼 때 다시 한번 고개 숙여진다. 선생의 성은 박씨요 이름은 진영(震英) 자는 실재(實載) 호는 광서(匡西) 본관은 밀양이다. 아버지 오(旿)는 호가 동천(桐川)으로 뒤에 형조판서에 증직되며 여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어머니 재령 이씨는 부제학을 지냈던 이 중현의 증손이요 현감을 지냈던 이경성의 딸이다.
선생은 선조 2년(1569) 11월 19일에 함안군 검암촌에서 출생하여 태어나면서부터 기개와 행동이 범인과 달랐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의 학문과 덕행이 두드러졌다. 임진년 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향에서 창의하여 공훈을 세우니 그로 인해 군자감 참봉에 임명되었고 뒤에 권률장군휘하의 장군으로 있으면서 활약하다가 선조27년(1594)부친상을 당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루고 다시 조명에 의해 원수부에 나아가 적을 맞아 싸웠다.
왜란이 끝나고 공신을 책봉할 적에 선생은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錄勳)되고 선조 32년(1599)에는 용궁현감에 임명되었다. 선조 34년(1601)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선조38년(1605) 왕명으로 경원판관(慶源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동안에 선생은 정 한강(鄭寒岡) 장려헌(張旅軒) 곽망우당(郭忘憂堂) 등 여러 선생과 함께 낙강에서 뱃놀이하며 시문을 짓고 학문을 궁구하기도 했다. 이 모임에는 30여명의 명현이 모여 그뒤 기락편방(祈洛編芳)이라는 사적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
선조 41년(1608)에 의주통판(義州通判)이 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 경흥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9년(1617)왕이 폐모(廢母)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조정의 압력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폐모반대를 하던 백사 이 항복이 북청의 적소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남의 눈을 개의치 않고 미포(米布)와 장구(葬具)를 갖추고 가서 장례를 치뤘다.
광해군 11년(1619)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순천군수겸 관우수어사가 되어서는 향교를 중수하고 강당을 열어 유생들을 강학(講學)케 하고 상벌을 엄하게 하는 등 사습을 바르게 하는 치적을 쌓았다. 광해군 12년(1620)에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청의 세력이 밀어닥치므로 서방이 동요하여 선생을 다시 순천군수에 유임시켰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이 반정공신책봉에 불만을 품고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난이 일어나자 선생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의 진영으로 달려가 우협대장(右脇大將)이 되어 두 아들과 함께 난의 진압에 전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과감한 계책으로 난을 진압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자 두 아들과 함께 진무일등공신에 책봉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황해도 방어사가 된다. 선생은 논공이 못마땅하였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임지에 부임하여 1년을 지내다가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리고 만다. 그 뒤 인조 4년(1626)판서 김 시양이 이괄의 난을 진압할 때 선생의 공훈을 왕에게 아뢰니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제수했으나 일시 조정에 나아갔다가 병을 칭하여 향리에 돌아오고 말았다.
이해 3월부터 선생은 두문불출하여 독서에만 전념하였다.인조 7년(1629) 조정에서는 김시양(金時讓)을 보내어 다시 출사하도록 권유해 보았으나 선생은 "내 본시 재덕이 없는 자로서 국은(國恩)을 깊이 입어 직위가 2품에 이르고 영화가 3세에 이르렀으니 신자의 분에 넘치는 지라 이제 이미 늙었고 또 병들었으니 나라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사양하고 조정을 찾지 않았다.
인조 14년(1636) 12월 청병이 압록강을 넘어 국토를 유린하고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70고령에도 불구하고 관찰사 심연에게 달려가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단신으로 남한산성을 향하여 달려 갔다. 다음해 정월 선생이 조령(鳥嶺)을 넘어섰을 때 적에게 항복하고 치욕스러운 화의가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임금이 오랑케놈에게 항복하고 동방수천리가 금수의 지역이 되었으니 무슨 낯으로 천일을 우러러 보랴"고 목놓아 울부짖고 기절하였다.
선생은 이후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인조 19년(1641) 11월 29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73세 였다. 돌아가신 뒤 인조22년(1644)에 자헌대부 호조판서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증직되었고 동27년(1649)에는 숭정대부판돈녕부사 겸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추배되었다. 영조 35년(1759) 사림이 도계서원을 세워 향사하였고 정조 22년(1798)존주록에 등재되었으며 고종 17년(1880) 삼황대보단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