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으로 일생을 바친 이인형 (1436~1497)
조선조(朝鮮朝) 오백년 동안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연산조때 충간(忠諫)으로 일생을 마친 매헌(梅軒) 이 인형(李仁亨)은 본관(本貫)이 함안(咸安)이다.
그는 대사성(大司成) 이 미(李美)의 큰아들로 1436년(세종18)에 함안(咸安)에서 태어나 11세 되던 해에 진양군 진성면 월아산록 가좌촌으로 이주하고 부친이 지방 자제 교육을 위해 지은 육영제(育英齊)에서 수학하였는데 어릴적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의(義)로운 일에 앞장서고 협력하는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20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33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내직으로 교리(校理) 응교(應敎)를 거쳐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연산군 5년에는 정조사(正朝使)로 중국 명나라에 가서 외교 활동도 하였다.
연산군 원년 12월 3일에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영남의 사림 출신으로서 대개 연소기예(年少氣銳)하여 대간(臺諫) 홍문관(弘文館)에 직을 맡았으며 진보적 사고를 갖고 보수적인 중앙 기성 벌열세력(閥閱勢力)을 소인 속배(俗輩)라 공격하다보니 정치적 알력이 생겨 대옥사(大獄事)가 일어났고 또 연산군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교자(驕恣)와 황음(荒淫)을 일삼아 문신의 직간(直諫)을 기피하려 하는데도 이 인형은 그의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고 충간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그는 연산군의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21회에 걸쳐 직간하였다. 연산군 2년 정월에 유점사와 낙산사에 소금을 공급하는 일에 대하여 대사간으로서 차자(箚子: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로 간(諫)하기를 「대저 일에는 대소와 경중이 있는데 임금은 그 대소 경중(大小輕重)의 적의를 잘 살펴서 때에 맞추어 거조(擧措)하여야 합니다. 땅을 개간하여 이랑을 만들고 바닷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드는 것입니다. 소금 고는 괴로움이 농상(農商)보다 고되므로 비록 국용(國用)만으로도 소민(小民)이 오히려 원망하옵는데 하물며 저 승도(僧徒)에게 공급함이라까? 승도는 부역을 벗어나서 놀고 먹으며 태평세대의 한민(閒民)이 되었으니 은혜를 입은 것이 이미 두터운데 하물며 백성을 여위게 하여 그들을 살찌게 함이리까? 무릇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과 함부로 소비하여 중을 구휼하는 것이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은 일입니까? 승도에게 그릇된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못살고 떠돌게 한다면 작은 것을 기르다 큰 것을 잃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 2년 1월)라고 간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위의 차자(箚子)에서 그의 정치사상(政治思想)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백성의 고됨과 심정을 이해하고 폭정과 교자(驕恣)한 정치로 기울어져 가는 연산군을 올바른 군주로 인도하려 하였다. 연산군 3년 8월 29일에 이 인형은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으며, 그가 금산태수(金山太守)로 있을 때 개령(開寧)사람이 밭을 갈다가 돌부처를 얻었는데 눈, 코, 입, 귀가 다 없어진 채 밭두렁에 놓아 두었다. 우연히 천식을 앓는 사람이 절을 하였더니 병이 약간 덜한 것 같았다. 이에 영험하다하여 남녀가 좋은 천과 향촉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밤낮으로 끊임이 없었으며, 중도 내왕한다는 말을 듣고 포졸을 보내어 잡아다가 쫓아버렸다. 점 필재(점 畢齊)가 시(詩)로써 태수를 치하하고 스스로 주석하기를「요골(妖骨)을 잡아 내쫓고 지전(紙錢)을 불살라 버려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밝게 그 잘못을 알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기특한 일이다.」(대동야승 해동잡록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공의 관직 생활은 항상 보국제민(輔國濟民)의 단충(丹衷)으로 내직에 있어서는 충간(忠諫)을, 외직에 있어서는 해이된 사회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의 신고(辛苦)를 덜게하는 안민위주(安民爲主)의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실정을 충간으로는 불가함을 직시(直視)하고 연산군 9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년 6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니 무오사화(戊午士禍)때 죄없이 죽어가는 선비들을 구하고자 수 많은 직간 상소를 올린 수창자(首唱者)라 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에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중종반정(中宗反正)이후 신원복관(伸寃復官)의 국령(國令)이 내리어 4년간의 고공(藁空)한 영구(靈柩)를 거두어 고향땅에 개장(改葬)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