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節義)의 학자 안관(安灌)(1491~1653)
선생의 휘는 관(灌)이요 자는 관지(灌之), 호는 취우정(聚友亭)이며 본관은 순흥이다. 고려말의 성리학자 문정공 안축의 7대손으로 1491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함안에서 살았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 열 살 때 사서를 통달했고 조광조 문하에서 이학(理學)을 배웠으나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김굉필, 정여창이 화를 입자 유학이 장차 쇠할 것을 예측하고 크게 통탄했으며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항상 고고한 선비의 기품을 잃지 않았으며 10년 병상의 부친이 위중할 때 손가락의 피를 목안에 넣어 소생케 한 효자로 알려져 1510년 돈녕부참봉(敦寧付參奉)에 제수됐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연이은 사화에 따른 세상의 어지러움을 예견해 완천당 박덕손과 함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 삼아 시를 짓다 1522년 함안 여항산에 은거했다.
한때 중종 임금이 그의 효성과 덕행을 높이 기리어 1537년 특별히 사직(司直)이란 벼슬을 제수하자 잠시 조정에 나아가기도 했으나 사화의 불씨가 계속되자 지조 있는 선비가 머무를 수 없다 여기고 물러나와 세상사와 담을 쌓았다.
1548년 만하봉(晩霞峰) 아래의 사락동(현 도움마을)에 터를 잡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자를 세워 취우정(聚友亭)이라 하면서 벗을 모아 경전을 강론하고 책을 저술해 도를 밝히니 많은 후학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1553년 63세에 생을 마감했다.
근사록문잡요어(近思錄問雜要語)와 중용수미천자해(中庸首尾天字解)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임진왜란으로 현존하는 것은 없고 후손과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가훈십조 家訓十條」*만 전할 뿐이다.
1780년 영남유생의 상소로 신암서원을 세워 선생의 높은 선비정신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으나 1993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또 취우정에 소장돼 온, 선생의 7대조이신 문정공 안축이 지은 근재집 책판 90매가 1979년 경남유형문화재 174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 가훈십조는 충효(忠孝), 성경(誠敬), 돈상문학(敦尙文學), 륭사친우(隆師親友), 목인임휼(睦隣任恤), 견득사의(見得思義), 계신유독(戒愼幽獨), 단정의관(端整衣冠), 재무구구(財無苟求), 난무구면(難無苟免)으로 선비의 도를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