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손양원(孫良源) 목사 (1902~1950)
1902년 6월 3일 칠원읍 구성리에서 아버지 손종일과 어머니 김은수 사이의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휘는 연준, 호는 산돌이다. 1908년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1914년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3학년 때인 1916년 동경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궁성요배를 하지 않아 퇴학을 당했다.
1917년 10월 3일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도움으로 1919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학교에 진학해 만두장사를 하면서 고학했으나 1919년 3월 24일 칠원읍 3·1독립운동을 지휘한 아버지가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자 1920년 4월 학업을 중단했다.
1921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우유와 신문배달을 하면서 야간중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했으며 1923년 귀국 후 1924년 대산면 옥렬리의 정양순 여사와 결혼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밀양 수산, 울산 방어진과 남창, 부산 감만동과 남부민, 양산 우너동교회를 개척했으며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39년까지 부산, 경남일원의 교회를 순회 전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다.
1939년 7월 14일 여수 애양원교회에 한국인 2대 목사로 부임해 한센병자와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하면서 이들을 치료해 주고 기도를 해 신앙의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이때 평생을 이들과 함께 하기로 하고 이름도 양원으로 바꾸었다.
1940년 9월 25일 신사참배 거부로 여수경찰서에 체포돼 옥살이를 하다 1945년 8월 17일 해방으로 석방됐으며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총살을 당했다.
10월 29일 장례식을 치르면서 유명한「아홉 가지 감사」의 말씀을 남겼으며 아들을 죽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아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을 실천해 20세기 사랑의 사도로 칭송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거부하며 집회를 계속했고 주위의 간청에 어쩔 수 없이 피난 배에 올랐으나 한센병자를 돌보겠다며 혼자 배에서 내렸다.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됐으며 9월 28일 여수 근교에서 총살에 처해져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1949년 안용준 목사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선생의 일대기를 출판했으며 후에 <씨앗은 죽어서>라는 이름으로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됐다. 1966년 선생의 삶이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1993년 선생과 두 아들의 무덤이 있는 애양원 뒤쪽 바닷가에 순교기념관이 준공돼 지금은 연4만명 넘게 다녀가고 있다.(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전화 061-682-9534, www.aeyangw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