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시어사 안유(安綏)
선생의 휘는 유(綏)요 본관은 광주인으로 광주안씨의 중시조이자 함안에 처음으로 정착하신 분이다.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나아가게 되는데 어사대 소속으로서 지방 정치, 풍속을 살피는 법사로 정5품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직책으로 영남의 안렴사(按廉使)를 제수 받아 고을마다 다니며 영남의 정치 등을 살피게 되는데 이때 함안 땅을 처음 밟게 되었다.
그리고 왜구들이 바다를 드나들며 수시로 변경을 침입해 약탈을 일삼는 등 백성들을 괴롭히자 이를 격퇴하여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하도록 해주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임금께서 특별히 총애해 많은 상을 내렸다고 전한다.
또 지방을 돌며 어려운 사정을 보살펴 선정을 베푸는데 힘썼으며, 특히 어진 성품으로 인의(仁義)의 정치로 백성을 다스려 도민이 감격해 주(周)나라 소공석의 감당지화란 고사를 상기하며 선정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시경에 나오는 감당(甘棠)이란 시(詩)를 보면
감당(甘棠)
무성한 팥배나무 자르고 베지 말라, 우리 님이 쉬시던 초막집
무성한 팥배나무 자르고 꺾지 말라, 우리 님이 쉬시던 곳
무성한 팥배나무 자르지 말고 휘지도 말라, 우리 님이 주무시던 곳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소공석이 백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배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해서 배나무를 건드리지 마라 했으니 백성들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것으로 선생의 행적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함안 배씨를 부인으로 맞아 두분의 아들을 두셨으며, 5세손 기(器)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판전농시사(현, 농림부장관)에 올랐고 굶주린 백성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와 잠업을 권장해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경기도 광주에서 평소 보아두었던 현재의 산인면 안인으로 옮겨와 살기시작 했으며 이곳에 우물을 파니 샘물이 얼음 같이 차갑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병자도 고쳤다고 전해지는 이 우물을 관찰정이라 불렀고, 정자를 지어 노년에 학문에 정진하며 소일 하였던 어사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삼봉산 기슭 가야읍 가야리 선왕동에는 광주 안씨 시조인 고려 대장군을 지낸 방걸 선조부터 13세까지 설단비와 신주비를 모셔놓고 매년 시제를 올리고 있다.
고려 때의 인물로 행적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상세히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