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 안지호(安知鎬) (1857~1921)
지사의 자는 운익(雲翼), 호는 우봉(藕峰)이며 1857년 9월 21일 고성군 풍화리에서 태어나 대산면 옥렬리에서 자랐다. 성품이 강직하고 총명했으며 일찍 한학을 익혀 훈장으로 학생을 가르쳤고 효성 또한 지극했다.
3·1독립운동 당시 전국민족대표 48인중 한사람으로 우국충정이 남달랐다. 1913년 부패시정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경남도지사에게 발송했으며, 일본의 강제 한일합방조약 체결에 분기해 1915년 9월 마산경찰서장과 일본 정부에 탄원서를 전달해 15일간 구류에 처해졌다.
1917년 12월 「일본은 도적의 마음으로 백성을 포악하게 다스린다.」는 규탄의 글로 구류 중에 사면됐다가 다시 조선총독부 데라우찌 총독에게 조선도 독립이 돼야 한다는 요지의 독립청원서를 보내 징역 3개월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19년 3월 19일 함안읍의거에서 태극기와 대한독립가를 휴대한 죄로 유치장에 수감되자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경찰관 주재소를 부수고 지사를 탈출시켰다. 군수를 앞세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경찰서장에게 만세운동을 한 사실확인서를 발급하라고 요구했다.
주모자를 검거할 때 63세였던 지사도 검거돼 대구복심법원에서 7년형을 언도받았으며 상고했으나 기각돼 형이 확정됐다. 상고심에서 「일본은 우리 군부(君父)를 시해하고 우리 동포를 살해하기를 수백 명이나 돼 나는 통곡하고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다. 문명세계에서 한 사람을 죽여도 용서받지 못하는데… 적수공권의 선량한 국민에게 병기를 사용하는 총독부를 비롯해… 도둑놈의 소굴에 소요를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될 때 붉은 죄수복 입기를 거부했고 마산형무소에 이감된 후 악독한 고문과 옥고로 몸이 위중하자 보석을 조건으로 자백서를 쓰도록 강권했으나 "내게 무슨 잘못이 있어 자백서를 써라 하느냐"면서 종이를 찢어 버렸다.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1921년 12월 23일 옥중에서 순절하시니 향년 65세였다.
1925년 전국의 유림향약본부에서 표창완의문으로 지사의 충의를 기리었고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으며, 서울 서대문형무소 독립관에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대산면 옥렬리에 추모비를 세워 지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