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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牛谷)

가야읍 설곡리

지금의 가야읍 설곡리 월성동으로 읍(邑)에서 5km정도 떨어져 있는 1개 리(里)에 1개 동(洞)뿐인 오지마을이다.

소실(牛谷)이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마을의 형상이 황소가 누워있는 것과 같다하여 지어진 것으로 전하며, 소는 먹을 풀과 마실 물이 많아야 살이찌고 건강하듯이 소실도 부유하고 재앙없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소의 입에 해당되는 위치인 동구(洞口)에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숲이 우거지게했는데 이곳을 사지정(駟止亭)이라고도 한다.

옛날은 우곡면(牛谷面)이라하여 지금의 춘곡리(春谷里) 신음리(新音里)전부와 도항리(道項里)일부도 포함하였으며, 소실(牛谷)은 면소재지동으로 면명(面名)을 따서 동명(洞名)으로 사용하였고, 가야면이 되면서 설곡리(舌谷里) 월성동(月城洞)으로 바꾸었다.

또한 설곡(舌谷)을 세(혀)실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동·서·남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북쪽 신음리와 경계지점인 바구치(바위가 솟아 우뚝하다는 듯)와 자라등(자라같이 생긴 산등성이)사이의 협곡만이 트여있어 마치 사람 입속의 혀와 같다하여 불려진 이름이며, 월성(月城)이란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달동네, 즉 벽촌이란 뜻이다. 오지(奧地)이며 협곡인 이 곳에 일제시대(日帝時代) 바구치와 자라등 사이를 가로막아 저수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주민의 반발로 무산되었다는 뒷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舌谷」은 혀「설」자와 골「곡」자로 「설곡」으로 표기하여야 함에도 구지 「혈곡」으로 사용해온 그 오묘한 뜻과 유래가 없다. 그것이 어떤 사람의 실수로 잘못 표기되어 쓰여진 것이라면 당연히 「설곡」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뱀골(蛇谷)과 불매고개(冶爐嶺)

바구치 위에서 월성동구(月城洞口)까지의 서쪽 산골짜기를 뱀골(뱅골)이라하며, 뱀골을 통하여 춘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불매고개(풀무고개)라 한다. 뱀골은 두 개의 작은 능선이 두 갈래로 같이 뻗어있어 뱀의 혓바닥과 같다하여 불러진 지명이고, 불매는 대장간에서 쇠를 녹일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루로서 옛날의 불매는 두 발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고개를 중심하여 월성쪽 산등과 춘곡쪽 산등이 옛 불매같아 지어진 이름으로 전한다.

사지정(駟止亭)과 사지봉(駟止峯)

사지정은 원성동구(月城洞口)로서 지형이 누워있는 황소의 입에 해당되는 곳이다. 정(亭)이라하여 무슨 누각이나 정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직경 5m의 동산(섬)을 만든 것을 말한다. 사지(駟止)란 네 마리가 끄는 수레(임금의 수레)가 멈추었다는 뜻이며 조선조(朝鮮朝)때 인조(仁祖)가 진양군 성주사에 둘렀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자연경관에 탄복하여 잠시 휴식한 곳으로 전한다. 교남지(嶠南誌) 고적조(古蹟條)에 駟止亭:「在君西舌谷里. 仁祖찬」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잘 보존되지 못하여 황폐화 되었다. 50년대(1950)까지만 해도 이 연못 옆에는 축대와 축대 주위로 5~6백년의 포도나무, 느티나무 등이 우거졌고 그안에 작은 운동장이 있어 남녀노소의 휴식처였으나 60년대의 재건운동, 70년대의 새마을운동 바람에 석축은 헐어져 도로로 변하였고 거수(巨樹)들은 고사되고 뽑혀졌으며 연못가에 서 있던 몇 아름드리 버드나무는 팔려나가 새마을 기금으로 사용되는 등 조상의 얼이 서린 자연경관은 사멸 버렸고, 사지정(연못) 89년 경지정리때에 완전히 없애버렸다. 사지봉은 사지정 바로 앞에 있는 마을 안산(앞산)을 말하는데 사지정과 같은 뜻이다. 사지봉 중턱아래에 작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공×바구(陰核岩)라 하여 이 바위 주변은 벌목(代木)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바위가 외부에 노출되면 마을 부녀자들이 미쳐나간다는 금기사상(禁忌思想) 때문에 산림(山林)이 잘 보존되고 있다.

숲논

마을 형성후 들이 논으로 개간되기 전에 어미등(魚尾登)을 중심으로 북쪽인 마을 앞을 외림(外林), 남쪽인 구일 저수지 아래쪽을 내림(內林)이라 하였고, 인조(仁祖)가 사지정에 쉬게 된 것도 이 외림, 내림에 반해서였다고 전하면 논으로 변한 지금 숲논으로 부르고 있다.

달돋골

달돋골은 원성동 아랫담을 총칭하기도 하지만 아랫골을 가로질러 흐르는 실개울의 다리(橋梁)이다. 이 다리는 아래 윗골 똑 같이 15˚정도 경사를 이루는 높은 위치이며, 마을 앞길에 서는 제일 먼저 달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정월보름달 달돋골 중앙을 기점으로하여 아래 윗골에서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아랫골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전해온다.

어미등(魚尾嶝)

박실재(朴實嶺)에서 서북으로 능선이 굽이쳐 흐르다가 중앙으로 빠져 이곳에서 갑자기 멈춘 산으로 월성마을 위 섬들(島野)에 위치한다. 옛날 산신령이 남강변 낮은 곳으로 산을 메고 가닥 이곳에 이르러 빨래하는 아낙네의 방정에 화가 난 산신령이 산을 두고 떠낫다는 전설의 산이다.

박실재(朴實嶺)

함안면 파수리, 가야읍 혈곡리, 군북면 사촌리 등 3개 읍면의 경계지점이면 원효암(元曉庵)에서 보면 앞 산마루이다. 박실(朴實)은 박구덩이로서 박줄(능선)이 북으로 뻗어가다가 인실(仁谷)과 신암(新岩)에서 박이 열렸다고 하는데 이곳을 명당으로 친다. 인실에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신암에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선대(先代) 묘(墓)가 있다.

신등

가야읍에서 혈곡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1km정도 들어가면 인실마을이 있다. 이 마을 앞산ㅇ르 신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천지개벽 당시 산이 걸어 내려오는 것을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어는 아낙이 그것을 보고 부지갱이로 세 번 두드리면서 “산이 걸어 내려오고 있다”라고 외치니까 산이 그곳에 멈추었다 한다. 일설에는 부부가 물을 지고 내려오면서 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남편은 아무 말없이 내려 오는데 부인이 그것을 보고 외치자 그 산이 내려온 것 만큼 더 올라가서 멈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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