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촌(月村)은 남강을 사이에 두고 의령과 경계하는 곳으로 당초는 월라촌(月羅村)이라고 했다. 그것은 이 곳의 모양이 마치 반월(半月)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이곳의 특산물(特産物)은 수박이며, 뜬늪(沼)이라 불리어지는 평야의 대규모 비닐하우스 단지내에서 생산(生産)된다.
월촌 본동 뒤편에 산이라기 보다는 구릉같은 것을 대산(大山)이라고 부른다. 그 형상이 방어산에서 보면 금송아지가 금말뚝에 매어져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조그마한 야산(野山)인데도 대산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은 방어산의 정기가 와룡정(臥龍亭)에 와서 끊겼다가 다시 이은 산이라 하여 대산(大山)이라고 하며 이 산의 정기를 끊은 사람은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곳은 대나무밭이었고 돌림병으로 죽은자나 아사(餓死)한 아이들을 매장한 곳이라 한다. 또 여기에서 옛날 토기편(土器片)이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공동묘지(고려장터)로 추측된다.
월촌 정류소(月村 精油所) 맞은편에 어사비(御使碑)라는 조그만 비석(碑石)이 하나 있는데 이 비문은 조선 영조시대의 사람인 박문수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어사 박문수가 임금의 특병을 받아 팔도(八道)를 암행하다가 월촌 지방을 방문(訪問)하게 되었다. 그 당시 월촌과 의령간에는 오래부터 있어온 논쟁(論爭)의 대상(對象)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함안과 의령의 경계구분(境界區分)이었다.
함안과 의령의 경계는 남강(南江)의 지류(支流)에 속하는 하천을 경계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하천의 물길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였기 때문에 경계를 명백히 구분할 수 없었다. 논쟁의 대상이 되어오던 터에 이것을 박문수가 지혜롭게 해결해 줌으로써 두 마을의 불화(不和)는 사라지고 사이좋은 이웃이 되었다고 한다.
월촌초등학교 뒤편 남강변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인 절벽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정자가 있다. 그 아래로는 강물이 굽이굽이 감돌아 흐르는데 이곳의 산세가 용이 누워있는 모습이어서 와룡(臥龍)이라 하였고, 용두(龍頭)위에 지어진 정자를 와룡정(臥龍亭)이라 한다.
와룡정(臥龍亭)은 조선 현종 때 건립된 단층목조(單層木造)의 팔작지붕이다. 헌종 때 죽남(竹南)에 살던 황기익(黃基益)이라는 선비가 산수(山水)좋은 강변에서 과거공부를 하였다. 그 후 그는 많은 문하생(門下生)을 거느리고 과거에 응시를 하였으나. 제자인 홍철태(洪哲泰)는 급제하고 스승인 황기익은 낙방하여 비통해 하니 흥철태가 스승을 위해 이 정자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월촌 앞의 넓은 들을 뜬늪(沼)이라 하며, 수박·채소등 대규모의 특산물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뜬늪(沼)의 유래는 그물설과 잉어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월촌의 조그마한 야산인 대산(大山)에서 지금의 월촌 정류장이 있는 어미(魚尾)고개까지가 그물 형상을 하고 있고, 맞은편 함박산이 잉어의 형상이다. 그리고 대산(大山)과 어미고개 사이에 움푹 파여 물이 스며드는 듯한 형상의 고개가 스므고개인데, 이 고개를 그물이 찢어진 것으로 간주하여 그 찢어진 그물을 뚫고 나와 잉어가 뛰놀 수 있는 곳이 뜬늪에 해당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이치 때문에 조선중엽 어씨가문(漁氏家門)에서 인력(人力)으로 땅을 파서 이 뜬늪을 만들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조씨(趙氏)들이 살면서 마을 이름을 뜬늪이라 했다는 유래도 전하지만 지금은 어씨들은 살지 않고 다만 어미고개에 어씨들의 묘가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