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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북면

군북면(郡北面)은 군(郡)의 서쪽에 위치하는 제일 큰 면(面)이다. 오늘의 군북면은 당초 대곡(大谷), 평관(平館), 산팔(山八), 죽산(죽산), 아도(아도), 남산산(남산산)의 6개리(리)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 가운데 1586년 정한강(鄭寒岡)에 의해 평관(平館)이 평광(平廣), 산팔(山八)이 산족(山足), 아도(阿道)가 안도(安道), 남산산(南山山)이 남산(南山)으로 바뀌게 되고, 조선 후기에 리(里)가 면으로 변화면서 6개리가 전부 면(面)으로 된다. 이중 안도면(安道面)이 현재 군북면의 중심지로서 지금의 덕대리(德岱里), 중암리(中岩里), 소포리(小浦里) 지역인데, 면소(面所)는 중암리 안도동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면소가 평광동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 평광면(平廣面)은 군내에서 제일 작은 면이었는데 오늘의 명관리(明館里)이다. "경상우도 영지선하(慶尙右道 嶺誌選下)의 방리조(坊里條)에 평관명 대신 구대곡면(舊大谷面)이라 하였고,"영남읍지 함안부사례(嶺南邑誌 咸安府事例)에는 아예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이웃 대곡(한실)면에 흡수 된 것이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그렇다면 평광은 함안군에서 최단명(最短命)의 면이 되는 셈이다.

한실, 즉 대곡면은 현재의 동촌리(東村里), 사촌리(舍村里), 오곡리(烏谷里) 일대로서 면소는 동촌리 동촌동에 죽산면(竹山面)는 모로리(慕老里), 사도리(沙道里), 월촌리(月村里) 지역인데 면소는 모로리 죽산동에, 남산면(南山面)은 장지리(長池里), 유현리(柳峴里) 일대였고, 면소는 장지리 남산동에, 산족면(山足面)은 박곡리(朴谷里), 수곡리(藪谷里), 영운리(迎運里),하림리(下林里), 원북리(原北里) 일대로서 면소는 하림리 하림동에 각각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1914년 3월 1일, 부군면(府郡面) 폐합시(廢合時) 행정구역이 대폭 개편되는데 6개 면 중 대곡·평광·안도 3개면이 통폐합하여 덕대리(지번 미상)에 터를 잡아 군북면(郡北面)으로, 죽남 남산 산족 3개 면은 폐합되어 죽산동(죽산교 서북방 100m 지점 느티나무 있는 곳)에 터를 잡아 죽남면(죽남면)이란 이름으로 각각 탄생하게 되며, 군북면은 7개리를, 죽남면은 10개리를 관할케 하였다.

면명(面名)은 유래(由來)에 있어 죽남면은 죽산면의 죽(竹)자와 남산면의 남(南)자를 따서 죽남(죽남)으로 쉽게 짐작 할 수 있으나 군북면은 그렇지 못하다. 흔히들 군북면의 유래로서 함안면에 있는 군성(郡城) 북쪽에 위치한다하여 군북(郡北)이라 했다고 알고 있지만 북쪽이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군북은 군성에서 볼 때 북쪽이 아니라 정서(정서)에 속하며, 함주지(함주지)에도 군북 일대를 기술 할 때 「在郡城西○里」로 기록하고 있어 「郡城北」의 지명유래설(地名由來說)은 잘못 된 것으로 군성(郡城)과 연관시켜 이름 했다면 군북면(郡北面)이 아닌 군서면(郡西面)이라 했어야 옳을 것이다.

군북면명(郡北面名)의 유래와 기인 된 것으로 군복(軍伏)과 궁북(宮北)이 있다. 군복(軍伏)이란 옛날 방어산성(防禦山城)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많은 군인들이 잠복하고 있었던 관계로 그 일대를 「軍伏」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방어산 일대는 당시(1914년) 군북면의 영역이 아니라 죽남면의 영역이었으므로 「軍伏」에서 「郡北」이 비롯되었다고 볼 수 없고, 단지 발음이 비슷한 뿐으로 누군가가 그럴싸하게 미화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궁북(宮北)」은 함주지(咸州誌), 경상우도영지선(慶尙右道領地選), 영남읍지(嶺南邑誌) 등의 시장조(市場條)에 나타나는 지명으로서 함안에 평림(平林), 방목(放牧), 궁복(宮北)의 오일시장(五日市場)의 설명에서 「宮北市: 在北西二十里安道面每旬四日九日開市 魚?貿易昌原鎭海兩市」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림장은 1953년 2월 말가지 장터가 있었던 대산면 평림리이며, 방목장도 가야읍 말산리에 있는 함안장(咸安場)의 전신(前身)인데 장터인 말산리 주변 지역을 예부터 방목이라 했고, 아직도 촌로(村老)들은 방목이라 부른다. 이 방목은 당시 면명(面名)인 가야(家倻) 보다 높거나 대등하게 불리어졌던 이름이었으며 「宮北」역시도 방목과 같은 위명을 가진 오랜 예부터 사용해 왔던 지명이었다.

「宮北」은 「軍伏」과는 달리「郡北」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단순성을 떠나 불가분의 깊은 연원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北」은 동서남북(東西南北)의 향방(向方)과 전후좌우(前後左右)의 위치(位置)의 뜻을 같이 지닌 글자지만 「北」은 어떠한 위치, 어떠한 상태이던 그 뜻하는바 방향은 일정하나 「後」는 상태에 따라 틀린다. 즉 사람이 북쪽을 향해 섰을 때는 남쪽이 뒤(後)가 되고, 남쪽을 향해 섰을 때는 북쪽이 뒤(後)가 되듯 어떠한 대상의 상태에 따라 그 위치가 정해진다. 여기에서 「北」은 「後」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宮北」은 (宮)의 뒤(後), 즉 궁지(宮地) 또는 궁성(宮城)의 뒤쪽(後便)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궁북장(宮北場)을 옛날에는 군뒤장 내지는 궁뒤장이라 발음했고 아직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北」은 「北向」이 아니라 「後便」임이 명백해진다.

그렇다면 「宮北」에 있어서 「宮」은 무엇을 말하고 어느 곳을 가르키는 것 일까? 그것은 옛 아라가야(阿羅伽倻)의 궁지(宮地)가 가야읍 가야리 가야동에 있었다고 세전(世傳)되고, 삼봉산에 있는 봉산성(蓬山城)은 고국유지(古國遺地)로서 가야국구기(伽倻國舊基)라고 함주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宮」은 가야궁지(伽倻宮趾) 또는 가야궁성(伽倻宮城)을 지칭함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따라서 「宮北」은 가야궁지(가야읍 가양동) 뒤에 있는 봉산성(고국유지) 너머에 위치함으로 궁뒤(宮北)가 되며, 항간에 떠도는 「郡城北說」이나 「軍伏」에 기인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당시 궁북면(宮北面)으로 하지 않았을까? 고래의 전통적 지명을 사용하지 못할 뚜렷한 이유가 없는 한, 여기에는 의도적이거나 물리적 농간이 개재(介在) 되었는지의 의문이 제기 된다. 앞서 말했듯이 군서면(郡西面)이라면 이해가 쉽지만, 군북(郡北)이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바로잡아 궁북면(궁북면)으로 해야 할 것이다.

군북(君北) 이란 지명은 일제치하(日帝治下) 이던 1914년 3월 1일 부군면 통폐합시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111호(號)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 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당시 우리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임의대로 산맥을 끊고, 혈(穴) 에 해당되는 곳에 쇠못(쇠막대)을 박아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던 그 때를 되돌아 보고 그들이 주장해 온 임나설(任那說)을 상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아라가야(阿羅伽倻)가 신라(新羅)에 망하여 한 시대의 왕조(王朝)가 마감되었을지라도 그 고토(古土)위에 함안이 새롭게 태어나 아라의 맥을 면면이 이오왔고, 이어갈 것이며, 「궁」이 아라왕조(阿羅王朝)를 상징하는 의지(意志)일 진대, 「宮趾」란 지명은 뿌리 깊은 역사의 숨결이 스며있고, 조상의 얼과 전통을 간직하려는 함안인의 슬기와 긍지로서 「宮」을 「郡」으로 바꾼 것은 그 의지와 자존심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 후 덕대리에있던 면소(面所)가 중암리(現敬老堂)로 옮겨지고, 1933년 1월 1일 죽남면이 군북면에 병합되면서 면소도 현재 위치인 덕대리 392-2번지로 이전 된다. 1976년에 함안에서는 최초로 현대식 2층 청사(건평 ***㎡)를 신축 면행정을 펴나간다.

1980년 5월 22일 군조례(郡條例) 제484호에 의거 월촌리 월촌(본동)에 월촌출장소(月村出張所)가 설치되고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의 행정구편 개편에 따라 덕촌(德村)이 덕촌과 지두(池頭), 모로(慕老)가 모로와 여명(黎明), 장지(長池)가 장명(長明)과 남산(南山), 유현(유현)이 유현과 봉덕(봉덕)으로 가가 분동(분동)되어 1989년 11월 현재 17리(리) 37동(동)에 가구(가구) 3,008호, 인구 10,728(남 5,270, 여 5,458) 총면적은 80,9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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