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가야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지질, 선사시대에서 아라가야 멸망 이후인 남북국(통일신라)까지의 유물을 다루고 있어 아라가야의 흥망성쇠를 살펴볼 수 있다.
함안은 경상남도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지리적으로 내륙과 해안으로 이동이 편리하여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이자 요충지였다. 강이 주는 풍요로움과 외부로의 우수한 접근성은 오랜 기간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함안 전통문화의 원동력이다.
함안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함안층에서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의 퇴적층으로 새 발자국과 공룡발자국 등이 확인되고 있는데, 당시 함안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대규모 호수 주변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호수 주변의 부드러운 땅에 남겨진 여러 흔적들이 굳어진 뒤, 융기되고 침식되어 현재의 지표면에 드러난 것이다. 함안 각지에서 화석이 확인되고 있어 공룡이 번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함안 용산리 백악기 새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함안 외암리 공룡발자국 화석(기념물)
함안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중기 구석기시대인 약 13만년 전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구석기 유적이 다수 확인되고 있으며 지표조사에서도 구석기가 넓은 지역에 걸쳐 확인되고 있어 향후 더욱 많은 구석기 유적이 확인될 것으로 전망된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정식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야 도항리, 군북 동촌리에서 신석기 전기(약 6,500 ~ 약 5,500년 전)의 토기가 확인되고 있어 주변에 관련 유적이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긁개와 찍개
빗살무늬토기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농경과 정착생활이 이루어지면서 크고 작은 마을이 생겨나게 된다. 함안에서는 가야 분지의 함안천, 군북 분지의 석교천, 칠원 분지의 광려천 주변으로 청동기시대 유적들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사람들이 함안에 모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함안은 강과 바다를 모두 접하고 있어 경남 동부권과 서부권 청동기문화의 연결지점으로서 상호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문화를 갖추어 나갔다.
여러 가지 청동기시대 유물
옥 장신구
화살촉
돌칼
선사시대 문화를 토대로 기원전후한 시기부터 신라에 멸망하는 6세기 중엽까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아라가야가 성립된다. 아라가야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안야국(安邪國)이 주변의 작은 나라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고대 국가로, 함안을 중심으로 창원, 진주, 의령의 일부를 포함할 정도로 광활한 분지와 넓은 해안을 영토로 하였다. 가야 전기에는 금관가여, 후기에는 대가야와 함께 전기와 후기를 통틀어 여러 가야국을 이끌었다. 북쪽에는 남강과 낙동강이, 남쪽에는 진동만이 있어 내륙과 해상으로 진출하기 유리하였는데,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아라가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4세기 전후에 더욱 성장한 아라가야는 5세기 무렵 말이산의 크고 높은 고분과 우수한 유물을 만들 정도로 정치·경제·문화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여러 가야국들을 대표하여 백제, 신라, 일본 등과 외교 활동을 주도하였다.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도기 일괄(보물)
굽다리등잔
불꽃무늬 토기
남조(중국)제 청자
별자리가 새겨진 덮개돌
봉황장식 금동관
말갑옷
아라가야는 5세기 후반 삼국시대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최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6세기 초반에 이르러 가야, 백제, 신라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압박을 동시에 감내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아라가야는 외교를 통해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백 년 넘게 지속되었던 나제 동맹이 와해되었고, 554년에는 백제와의 관산성전투에서 승리한 뒤 큰 장애물 없이 가야로 진출하였다. 결국 6세기 중반 아라가야는 대병(大兵)에 의해 신라에 복속되고 만다.
신라는 아라가야 옛 터를 다스리고 방비하기 위하여 성산산성을 쌓고 지방의 군사 조직인 소삼정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757년(경덕왕 16년)에 군의 명칭이 비로소 ‘함안군’으로 변경되었으며, 속현으로 현무현과 의령현을 두어 관할하였다. 그 중심지는 과거 아라가야의 중심지가 아닌 지금의 성산산성 남쪽 일대(지금의 함안면)로, 이곳에 새로운 계획도시를 건설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또한 창림사 탑기에 지방의 불교 관련 업무를 담당한 승관직(僧官職)인 군통(君統)이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아라가야가 멸망한 후에도 함안 지역이 여전히 정치·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인장
목간과 항아리
굽다리접시
귀신얼굴모양 기와
암막새 기와
수막새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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