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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가라국계의 여러가지토기 POTTERIES

  • 국적/시대한국(韓國)/가야(加耶)
  • 출토지
  • 재질
  • 크기
  • 전시실제3전시실
  • 지정

기원후 562년 멸망한 가야로서 후기가야의 중심국으로 존재하였다. 대가야로 불리워지지만 이는 후대에 붙혀진 이름으로 원래는 가라국이라 불리워졌다. 이 토기들은 당시 고령가라국계의 토기로서 제가야는 각자 나름대로의 토기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김해식, 함안식, 고성식, 고령식등으로 분리되었다. 고령의 가라국(대가야)은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棺 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김해 지역의 남가라(금관가야)를 대가야로 언급한 기록도 있으나 맞지 않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가야연맹은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침입으로 큰 타격을 입고 세력이 약화되면서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반면, 5세기 이후에는 고령·함안, 합천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이 농업에 유리한 입지조건과 제철(製鐵)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룬 반파국,(伴跛國고령지역에 있던 소국)또는 반로국은 5세기 후반에 새로이 시조설화를 만들며 대가야를 표방하였다. 대가야는 합천·거창·함양·산청 등지를 포괄하는 후기 가야연맹의 중심국으로서 국제사회에도 등장하였다. 479년에 가야왕加羅王 하지(荷知)의 이름으로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고, 481년에는 백제·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진행된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되었다. 554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오히려 562년 신라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대가야는 정치적으로 삼국보다 발전하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가야금을 제작하고 음악을 정리하는 등 높은 문화수준을 보유하였다. 또한 지산동 고분을 비롯하여 본관동·중화동·양전동·종암동·쾌빈동 등 고령지역에 분포한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들은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담당부서 :
가야문화유산담당관 박물관담당
전화번호 :
( ☎ 055-580-39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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