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 가야

삼국은 일반적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일컫고, 지금까지 가야는 주로 삼국의 테두리 내에서 역사가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삼국시대가 당시의 상황에 적절치 않아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 혹은 각 지역에 분포하는 제(諸) 가야를 독자적인 지역국가로 보아 다국시대라는 용어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 용어 역시 문제점이 많으므로 삼국시대의 한 테두리 내에서 가야사를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가야는 한반도 남부지방의 낙동강유역과 남강, 황강 등과 남해안의 바다를 끼고 성장한 각 지역의 소국들이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변한(弁韓) 12국에서 발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접도국(接塗國),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순시국(古淳是國),반로국(半路國),악노국(樂奴國),군미국(軍彌國),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감로국(甘路國),구야국(狗邪國),주조마국(走漕馬國),안야국(安邪國),독로국(瀆盧國)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려중엽에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함안),고령가야(高寧伽耶:함창),대가야(大伽耶:고령),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 ,소가야(小伽耶:고성),금관가야(金官伽耶:김해),비화가야(非火伽耶:창녕)가 있었다고 전하고, 《일본서기》에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제(諸) 가야 외에도 탁순(卓淳),탁기탄(喙己呑) 등의 소국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각 역사서의 기록에 비추어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560년경까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 졌다. 그러나 변한의 제(諸) 가야는 각 지역마다 독자적인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지역국가 단계에 머물러 있다가 562년 고령의 가라국(대가야)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한편, 가야는 시기에 따라 크게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구분된다. 기원 전후부터 4세기 대까지를 일반적으로 전기가야라 하는데 이 시기의 주도국은 철 생산과 교역을 중심으로 한 김해의 남가라국(금관가야)이다. 후기가야는 5세기부터 가라국의 멸망시기인 562년까지를 말하며 주도국은 고령의 가라국(대가야)과 함안의 안라국(아라가야)이라 할 수 있다.

가야의 위치비정 지도

삼국시대-가야의 주요나라 위치도

안라국(아라가야)

말산리 파괴분 전경

삼한시대 안야국이 성장하여 안라국이 된다. 그 시기는 포상팔국 전쟁이 일어난 이후인 3세기 말 4세기 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가 되면 안라국은 칠원지역을 포함한 오늘날 함안의 전 지역을 통할하게 된다. 또한 지금의 마산에 있었던 골포국을 통할함으로서 바다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중심 지배집단은 말이산고분군을 축조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안라국에 대한 국명은 다양한 형태로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아시랑국(阿尸良國)과 아나가야(阿那加耶)로, 물계자전에는 아라국(阿羅國)으로, 《삼국유사》 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로, 《일본서기》에서의 안라(安羅)와 아라(阿羅) 등의 모습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국명들 가운데 이제까지는 주로 ‘아라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왔으나, 이는 가야가 존재했던 당시의 이름이 아니라 신라말 고려초에 생겨난 이름이기 때문에 부적당하다. 아시랑(阿尸良)에서의 ‘시(尸)’는 옛말의 사잇시옷을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아시량은 ‘아ㅅ라’를 표기한 것이고, 이는 아나(阿那), 또는 아라(阿羅)로도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아시랑(阿尸良), 아라(阿羅), 아나(阿那), 안라(安羅), 등은 모두 ‘아ㅅ라’라는 나라를 표기한 음차 혹은 훈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음을 기준하여 볼 때 사잇시옷은 ‘ㄹ'받침의 음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아ㅅ라’는 ‘알라’로 읽혀진다. ‘알라’의 음차자로 가장 가까운 것은 ‘안라(安羅)’로 보여지므로, 현 함안 지역에 있었던 국명으로는 ‘안라(安羅)’ 또는 ‘안라국(安羅國)’으로 표기함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안라국은 고령의 가라국과 더불어 후기 가야 여러 나라들을 주도하는 가야국으로 성장하였으며, 바다 건너 왜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행하였다. 529년에는 ‘안라 고당회의’를 주도하는 등 가야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지만, 561년 무렵 신라에 의해 무력으로 정복당하고 만다.

안라국의 유적

법수면 황사리고분군

유적은 함안군 법수면 황사리 매곡부락 일대 완만한 산 능선사면에 조영되어 있다. 1991년 국립경상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덧널무덤 47기, 독널무덤 3기를 확인하였다. 시기는 주로 4세기 대가 중심을 이룬다.

중·소형덧널무덤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이 고분군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 지역의 촌주급이거나 일반민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 유적은 함안분지의 중심에서 벗어나 남강천변의 구릉에 입지한 주변지역의 묘제연구와 토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처음으로 제공해 주었다.

법수면 윤외리고분군

유적은 함안군 법수면 윤외리 341번지 일대의 야산 구릉에 조영되어 있다. 1992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모두 7기의 덧널무덤이 확인되었다. 시기는 황사리고분군과 비슷한 4세기 대가 중심을 이룬다.

이 유적 역시 인근의 황사리고분군과 비슷한 일반민들의 무덤으로서 4세기 대의 가야권주변지역의 묘제연구와 토기문화에 대하여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칠원 오곡리유적

유적은 함안군 칠원면 오곡리 산 25번지 일대의 얕은 구릉에 조영되어 있다. 1994년 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청동기시대 집자리 4동과 고인돌, 널무덤, 가야시기 덧널무덤, 구덩이식돌덧널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이 중 안라국 무덤은 모두 15기가 조사되었다.

대부분 덧널무덤이며, 2기만 구덩이식돌덧널무덤이다. 무덤은 주로 능선의 경사면에 기반암인 혈암을 파고 등고선방향과 나란하게 축조되었다. 규모는 대부분 5m이하의 중형무덤이 많으나 가야5호, 9호, 11호는 6m전후의 대형무덤이다. 그러나 금동품 등의 위세품이 확인되지 않아 당시 가야 도항리·말산리고분군을 중심지배층에 예속된 주변지역 수장층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이 유적은 가야권의 발굴조사에서 벗어나 칠원권의 무덤변천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 변천상과 성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말이산고분군

함안군 가야읍에 분포하는 말이산고분군은 행정구역상 도항리와 말산리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대형무덤이 도항리에 분포하는 관계로 도항리고분군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유적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에 의해 말이산 34호분(現 4호분), 5호분(現 25호분)등이 발굴조사 된 후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86년 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도항리14-1호, 14-2호가 조사되었다.

이 2기의 대형무덤은 도항리고분군의 성격을 재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함안지역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연구자에 의한 발굴조사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다가 1991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도항리 35호분과 그 주변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청동기시대 고인돌 8기와 집자리 1동을 확인하였다. 이로서 도항리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인간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가야읍 해동아파트 공사 중에 발견된 소위 '馬甲塚'이라는 초대형덧널무덤을 통해 5세기 전·중반 대 안라국 지배층의 고분문화의 성격과 양상을 규명하였고 안라국 철기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다.

이 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말이산 고분군의 정확한 성격규명을 위해 1992년~1996년까지 5차례의 연차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고총고분인 5호분, 8호분, 15호분 등과 널무덤 20여기, 덧널무덤 20여기, 구덩이식돌덧널무덤 10여기, 돌방무덤 3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안라국 지배층의 무덤변천과정과 당시 안라국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1997년~1998년에는 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는 도항리와 말산리일대의 도로 확장공사 및 단독주택신축 등에 의한 긴급발굴의 일환으로 모두 5차례의 시·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널무덤 38기, 독무덤 3기, 덧널무덤 37기, 구덩이식돌덧널무덤 4기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2002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는 말산리 451-1번지내 건물신축공사에서 석곽길이 약 8m 65cm, 너비 1m 65cm인 초대형구덩이식돌덧널무덤1기를 조사하였다.

토기가마터

함안지역에 분포하는 수많은 고분군의 매장주체부에 부장된 토기는 어디에서 공급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점은 함안지역 고분문화의 최대관심사였다.

드디어 1995년 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하여 함안 묘사리 윗 장명일대의 토기가마터는 이러한 의문점을 해결하는 1차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뒤이어 1999년,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조사보고를 토대로 묘사리 토기가마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면적 내에서 모두 5기의 토기가마터가 확인되었고, 이 중 2기의 가마와 1기의 회구부 등이 조사가 이루어졌다. 모두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굴착한 반지하식 등요로서 가장 규모가 큰 2호가마는 세장한 선저형으로 전체길이 20m정도이다. 유물은 승석문이 새겨진 짧은목항아리가 주를 이루며, 工자형굽다리접시, 화로모양그릇받침, 컵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조업연대는 4세기 중반~5세기 전반대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2002년 국립김해박물관에서는 법수 우거리토기가마터를 확인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인근지역인 묘사리토기가마터와 더불어 이 시기 대단위의 전문화된 생산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묘사리 장명토기가마터, 우거리 토기가마터의 발굴조사는 함안일대에 발견되는 동시기의 고분군유적과의 수급관계 및 생산유통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4세기 대부터 발생하는 고식도질토기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성산산성

성산산성은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괴산리일대에 분포하는 조남산(鳥南山) 정상부와 구릉에 축조되어있다. 인근에 도항리·말산리고분군이 분포하고 있어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아 1963년 사적 제67호로 지정된 함안지역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이로 인해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가야문화권 중요유적 학술발굴조사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1994년부터 매회 추가보완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산성은 전체성벽의 크기가 둘레 약 1,400m, 면적 102만 460㎡으로서 조남(造南)산성이라고도 불린다. 《함안읍지》에 의하면 이 산성은 '가야국의 구허(舊墟)'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산산성은 이전까지 토석혼축성(土城混築城)으로 알려져 왔으나 조사결과 견고한 석성이 협축된 석성으로서 외벽보강구조물(外壁補强構造物)이라는 축성방법과 명문목간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구조물과 명문목간에 의해 성산산성을 신라의 성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며 가야의 산성축조방법과 명문목간의 해석에 있어 약간의 문제점이 제기되어 확실하게 신라성으로 단정 짓기는 아직 시기상조일 것이다. 이는 2003년 제9차 조사지역인 연지에서 5세기대의 가야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산성의 초축이 가야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산산성의 출토유물로는 뻘층에서 다량의 목기들을 비롯하여 목간, 무경식암막새기와 귀신얼굴막새기와, 연꽃문양막새기와, 뚜껑 등이 있다. 시기는 대략 6세기 중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산산성 출토 목간

중국에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필기도구로 나무나 대나무가 사용되었다.

긴 경전을 얇은 대나무에 먹글을 써 넣은 대나무조각이나 나무조각들을 끈으로서 횡으로 묶었으니,'책(冊)'이라는 한자는 바로 이를 형상화 한 것이다.

한국에서의 목간은 종이와 함께 사용되었고, 재질의 특성상 종이와 서로 보완관계에 있었다. 종이는 젖거나, 구겨지기 쉬운데다가 값이 비쌌다. 따라서 장거리로 이동되는 짐의 꼬리표와 같은 경우는 종이보다 나무를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또 나무는 글자가 씌어진 부분을 작은 문방구용 칼로 깎아내면 다시 쓸 수도 있었다. 성산산성에서는 약 230여점의 목간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목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목간자료 뿐만 아니라 그 양이 방대하여 문헌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함안의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제공해 줄 뿐만이 아니라 가야사의 한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기초적인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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